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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일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퍼옴)

by 시심리도학 2022. 11. 16.

출처 : 고갱의 세 가지 질문 : 네이버 카페 (naver.com)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볼만하다.

고갱도 고흐만큼 불우한 인생을 살다간 화가였다. 어머니 쪽에 페루인의 피가 섞인 고갱은 생전에 주류에 속하지도 또 주목받지도 못한 생을 살다 갔다. 뱃사람으로, 주식 중개인으로 그리고 화가로 직업을 바꾼 그의 인생 여정을 미루어 보면 매우 충동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짐작게 한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페루, 파나마, 타히티 등을 떠돌며 방랑자와 나그네 같은 삶을 산 그는 사람과의 관계 또한 서툴러 고흐와 같이 지내다 오히려 원수가 돼 헤어졌고 가족들에게도 소외된 채 혼자 외로운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에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고 또 알고 싶었다. 그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지, 태어남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이런 풀리지 않는 의문과 불안을 고갱은 죽기 몇 년 전에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게 바로 위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일 것이다. 다들 대충은 알지만 확신은 없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물음을 풀려 하고 어떤 사람은 철학에서 답을 얻으려 한다. 위 세 가지 질문은 궁극적으로 왜 사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다른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태어났으니 살 수밖에, 그럼 죽으란 말이냐?"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 말이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란 물음은 좋은 질문은 아니다. 규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물음은 잘못된 질문이다. 철학적으론 가능한 물음이지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의미 없는 질문이다. 즉, 이 문제를 가지고 낑낑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부질없고 소모적인 논쟁을 가지고 인생의 낭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의 관점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100년 전에 태어났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고 설령 답을 찾았더라도 미신에 의지했거나 아니면 전통과 관습에 의한 답을 얻었겠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과학적 지식과 소양으로 자연과 인간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또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1) 중학교 1학년 때, 봉천동 8부 능선 우리 집 골방으로 두 자매님이 찾아오셨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때 성경 책을 처음 봤다. 두 분은 나에게 '파수대'와 '깨어라'라는 책을 주셨고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두 책에는 천국에서의 생활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는데 사자와 어린아이가 같이 뛰노는 모습과 흑인과 백인이 같이 행복하게 웃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의심이 많아서인지 내가 천국에 간다는 것도 또 천국이 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에서 증거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건 태어나 보니 내가 죄인이었다. 선악과가 어떻고, 아담과 하와가 어떻고, 뱀이 어떻고를 알려 줬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 게 나와 무슨 상관일까를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겉으론 믿는 척했지만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와 같이 끊임없이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갈 뿐 어는 곳에도 안착하지 못했다. 드디어 소정(?)의 교육을 다 받고 왕국 회관에 나갔지만 사정(나의 믿음)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 살 날이 많아서 천국과 구원이 절실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소 불안했지만 여호와의 증인에서 스스로 나왔다.

2) 10 년 전부터 마음의 종교인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붓다의 깨달음을 이해하려고 했다.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집착이고 그 집착을 멸하면 도에 이른다는 이른바 '고집멸도'에 격하게 공감했다. 젊었을 때는 들리지 않았던 내면의 목소리도 들리고 욕심을 움켜쥐고 세상적인 것에 매달리는 짓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알 것 같았다. 특히, 신비로운 선 사상에 끌려 육조단경과 무문관을 읽고 달마로부터 이어진 선의 계보에 대해 공부했다. 어렸을 때 절에서 느껴떤 4대 천황의 무시무시한 얼굴과 부처님 불상에서 느꼈던 고리타분함을 비로소 지울 수 있었다.

그 후 불교를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정토회 불교대학에 (몰래) 입학하였으나 몇 번 다니다 가정불화(?)로 중도에 그만두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눈치를 챈 것이다. 다시는 얼씬 거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일단락됐다. 싱겁게 아내에게 항복한 이유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내가 아내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아내가 불편해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무리 숭고해도 아내를 포기(?) 하면서 까지는 아니지 싶다.

3) 철학적으로 생과 사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잘 풀리지 않았다. 철학은 질문을 하는 것이지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은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자명한 것을 의심하도록 부추기고 사주(?) 하기까지 했다. 난해하고 말장난 같은 철학자들의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철학에서 인생의 심오한 물음과 답을 찾고자 기대했으나 속된 말로 글렀음을 직감했다.

구구절절 난해하고 친절하지 않고 어려운 말만 하는 철학자들은 도대체 얼마나 잘 살았을까를 살펴봤는데, 으음... 실망 그 자체였다. 정말 도덕적이고 철학적으로 산 사람은 스피노자와 칸트 그리고 애덤 스미스(그러나 세 사람 모두 독신이었다. ㅜㅜ) 정도였고 나머지는 다 이상하게(?) 살다 갔음을 알고 한동안 큰 실망과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철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려고 할 때,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철학자들은 옳은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불안전한 인간에게 완벽함을 바라는 것부터가 애초에 잘못된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다시 철학 책을 집어 들 용기가 났다. 아무리 똑똑한 철학자라 해도 고갱의 세 가지 질문을 멋지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이 땅에서 잘 사는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상을 이해하고 또 이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해와 해석은 자신의 직관과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인생은 항상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직관과 경험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편협성에 빠질 수 있다. 하나만 아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종교든 철학이든 이념이든 일방통행이 제일 위험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 복잡한 이 세상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경험 이외에 지식과 탐구 그리고 사유가 필요하다. 즉, 공부하고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인생이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려운 이유인 것 같다.

우리는 무엇(누구) 인가?

며칠 전 아내와 종묘에 가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돌아왔다. 몇 번 가봤지만 한 바퀴 둘러보기에 정말 좋은 장소다. 아쉬운 건 정전이 2024년 6월까지 보수 중이라 구경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문화 해설사에게 종묘 정전 제례에 대한 해설을 들었는데, 순서는 대략, 혼과 백(신)을 부르고, 신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이를 자손이 음복하고, 신을 되돌려 보내는 절차로 진행된다고 한다. 종묘를 나오면서 든 생각은 우리 신들은 그만한 예우를 받기에 합당한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난리를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말이다. 신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움인가? 아니면 앞으로 날 잘 보살펴달라는 기원인가? 종묘의 가을 정취는 아름다웠지만, 종묘 제례에 대한 느낌과 생각은 별로였다.

흔히 인간을 가리켜 신과 동물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정말 어떤 존재일까? 불멸하는 존재인가? 생각하는 존재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위대한 존재인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여 위대한(특별한) 존재로 보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말을 하고 글을 읽고 사유(생각)를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특별한 존재인 인간을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동물들과 동격으로 보는 건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또 먹이 사슬의 맨 마지막에 인간이 있다. 즉, 모든 생명 중에 서열이 1위다. 그러니 모든 동물과 생명은 인간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인간은 문명을 이루고 문화 예술을 발전시키고 또 수많은 유산을 남기고 유적을 만들지 않았는가? 이는 천지 창조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 아닌가?

위대함과 특별함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같은 인류끼리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래도 위대한가? 가축을 사육하여 먹을 고기를 얻는 것이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일인가? 문명을 이루고, 경제 발전으로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이라면 그게 가치 있는 일인가? 인간을 생각하면 위대함과 추악함이 공존한다. 어떤 유형의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인가? 내가 추구하는 인간은 (무언가의 희생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으로) 자신의 이로움(무언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추구하는 인간이다. 나의 이로움은 누구(만물) 에겐 수고로움(희생)이니까.

다윈의 진화론을 접하고, 칼 세이건, 에드워드 윌슨 그리고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기원에 대해 궁금했던 많은 물음에 실마리가 풀렸다. 그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새벽에 동이 트듯 서서히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왔고, 내가 누구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 알수록 허무한 것도 잠시, 그보단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그냥 죽으면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드디어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처럼 원하는 것이 없으면 자유인이다.

무언가를 붙들고 살면 추해진다. 자유가 별거 아니다. 죽어도 좋다가 자유다. 죽음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공정하고 또 정의롭다. 그래서 죽음은 진리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민국 교육헌장 첫 구절이다.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외우라고 해서 죽기 살기로 외웠다. 어린 마음에도 매우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런 삶을 살아야 지라며... 목적론적 인생관은 일방통행이다. 목적이 훌륭하고 숭고하면 할수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많다. 목적론적 인생은 작은 성공을 맛볼 수는 있지만 큰 후유증을 남긴다. 그 후유증은 대부분 타인에 대한 공격과 무참한 죽음으로 나타난다.

목적론적 인생관은 운명론과도 맞닿아 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듯이 태어났으니 돌아가는 곳이 있을 거라는 거다. 인간과 같은 고상한 영혼은 어둠침침한 땅속 말고 눈부시고 찬란한 하늘나라와 같은 은총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생전에 부끄러운 짓과 크고 작은 죄가 많은 나는 왠지 염치없고 면목없고 또 쪽팔리기까지 하다. 뭐가 잘 났다고, 뭘 잘해서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그래서 그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반납하거나 사양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그럼 죽어서 어디로 가야 하지? 음침한 땅속에 묻혀 서서히 썩어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보단 한 줌의 먼지로 바람에 날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무의 뿌리로 빨려 들어가 새순으로 잉태되어 빛나는 햇볕을 보면 좋겠다. 아니면 흐르는 물을 타고 굽이굽이 강을 따라 바다로 가서 해류를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여행하고 싶다. 그도 아니면 창공을 떠도는 공기 속의 먼지가 되어 공기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높이까지 올라 아름다운 지구를 내려다보고 싶기도 하다. 그래, 내 몸을 아주 잘게 부수어 수목원 어느 나무 밑에서,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서, 배를 띄워 무인도 갯바위에서 이른 새벽 아무도 몰래 내 몸을 허공에 뿌려다오....

영광스러운 순간도 없었던 내가, 자랑스럽게 산 것도 아닌 내가, 훌륭하게 산 것도 아닌 내가 떡하니 무덤이나 납골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한 삶도 아니고, 나라를 구한 훌륭한 삶도 아니고, 남을 위해 희생한 삶도 아니다. 단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쓴 삶인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묏자리를 쓴단 말인가. 그래,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잊히고 싶다.

내겐 세계 각국의 아름다움과 웅장함 그리고 장엄한 광경을 여행하고 느끼는 것보다 사람과 세상을 더 잘 알고 싶다. 내겐 그랜드 캐니언의 장관이나 북한산에서 본 전망이나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또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거니는 즐거움이나 동네 한 바퀴를 또는 산책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문화 유적과 자연을 즐기며 감탄을 하고 감동을 느끼는 것보다, 살면서 인생을 배우고, 일하면서 사람을 알아가는 그런 생생한 경험과 느낌을 간직하고 싶다.

거창한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평등, 공정, 정의 이런 거에 목매지 않고, 그냥 욕심 안 내고 적당히 살고 싶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의 식사와,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생활과, 쾌락과 중독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고 싶다. 그러니까 지구에 최소한의 (어쩔 수 없는) 민폐를 끼치며 조용히 살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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